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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 형경자
"남부 뉴저지 한국학교 40주년을 축하 드립니다"
2대 교장
형 경 자
먼저 40주년을 맞이하는 남부뉴져지 한국학교에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40주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를 써 올 수 있기까지 학교를 지켜오고 계시는 선생님들과 이를 후원해 오신 이사회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조국을 떠나서 이민의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경제적, 문화적 위상이 높아져서 누구에게도 지난날 6-25 전쟁후의 대한 민국으로 대접받지 아니하고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음을 또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전후의 참혹했던 그 대한민국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에는, 우리 세대의 피땀어린 노력도 작은나마 기여해 왔음을 또한 자랑스러움으로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돌아보니 그때만 해도 젊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1992년 이사회에서 한국학교 교장을 맡아달라는 제의에 이럴까 저럴까를 망설이던 중이었습니다.
LA 사태보도를 보고 있는데, 메이져 방송 뉴스에서 LA폭동의 원인이 마치 우리 한민족의 책임인 듯 몰고 가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로드니 킹 사건이 도화선이 된 흑인 폭동이 한인 타운으로 번져가서 어렵사리 이민의 삶을 살아온 우리 한인 상가들이 무참히 짓발히는 상황에서, 뉴우스 앵커들은 마치 이 흑인 폭동이 한인들이 경제활동은 흑인 동네에서 해서 돈을 벌면서 흑인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방송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조용한 분노 같은 것이 밀려 왔습니다.
“그래 누군가는 해야지, 누군가가 한국인의 얼을 우리 2세들에게 바로 심어주지 않으면 그냥 혼자 열심히 살아도 저렇게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얘!!!” 하는 생각이 그 밤, 밤잠을 설치게 했습니다.
그 밤을 지나고 이사회에 한국학교 교장을 해 보겠다고 승락을 했던 것이 1992년 4월이었습니다.
그렇게 한국학교장을 맡고 8년간을 이일을 감당하면서 사실 참 많은 것을 보고 배웠던 것 같습니다.
내 앞에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던 한국학교 교장직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90여명의 우리 아이들은 건물을 사용료없이 빌려쓰는 상황에서 참 많이 교회측에 미안해야하는 일들을 만들고는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학교가 체리힐 제일 감리교회의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교회는 참 많은 배려를 해 주었었습니다. 사용료는 1불도 내지 않고 새로 지은 새 교회 건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그 때 새로지어졌던 새 교육관 건물을 한국학교가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 주시는 일은 쉽지가 않은 상황에서 허락해 주셨음을 알기에 아이들이 사고를 칠 때 마다 정말 많이 죄송하고 수업이 끝나고 나면 곳곳을 둘러보며 살펴야 했지만 아이들이 하는 일은 우리 어른들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기발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곤 했습니다.
때로는 왜 이 일을 맡아서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 하루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 일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 일이 얼마나 의의 있는 일인가를 생각하며 어린 생명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비록 일주일에 세네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 교사들이 바로 깨어 있으면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중요한 정신을 이들에게 부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60여명이던 학생이 100명이 되고 여러가지 보람있는 행사를 하면서 진정한 보람을 느끼며 8년을 우리아이들과 함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제 삶에 참 의미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한국학교에 학생을 보내오는 학부모님들이 이미 미국에서 교육을 받으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그때만해도 대다수의 학부모님들이 미국에서 교육을 받아본적이 없으신 부모님들이었습니다.
부모님들과 우리 아이들과의 사고의 차이를 많이 힘들어 했던 때 였습니다.
여기에서 부모님들과 우리 자녀들에게는 학교가 해야할 좀더 다른 필요가 내재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한국학교가 한글 맞춤법만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피부색이 다르고 생긴 모양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 두 가지의 너무나 다른 문화권을 살아야하는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힘드는지를 부모님들에게 이해시키고, 또 이민 1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부모님들의 어려움을 자녀들에게 조금이라도 이해를 시키는 일을 위하여 작은 노력들을 더해갔습니다.
해마다 학습 발표회를 준비하면서 참 힘이들기도 했지만 정말 보람되기도 했습니다.
한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우리 아이들과 연극을 준비하는데, 흥부전, 심청전 등을 하다가 한해에는 주제를 우리 부모님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내용으로 가서 세탁소에서 부모님들이 겪는 아픔을 가지고 연극을 준비하면서 아이들에게 제목을 무어라 하면 좋겠는가를 의논을 했었는데 아이들이 정한 제목이 “So Sue Me!”였습니다. 가게에서 부모님들이 손님들에게 겪는 어려움을 보아온 아이들의 마음이 담겨진 내용이었습니다. 한번 웃고마는 짧은 연극이었지만 아이들이 부모님을 부모님이 아이들을 서로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학습 발표회에서 겨우 네 다섯살인 학생이 애국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어서 불러주던 아이는 지금도 자기 자신에게나, 부모님에게나 좋은 기억이 되어 남아 있음을 봅니다.
어느 자동차 써비스 센터에를 갔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한 청년이 안에서 일을 하다가는 저를 보고 뛰어 나와서는 어설픈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에 어리둥절해서 보고 있짜니 자기가 한국학교에 다녔던 누구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학교에서 만났던 학생들은 이미 성인이 되어 이미 많은 아이들이 결혼을 했고, 몇명은 저들의 결혼식에 참석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잘 자라서 한 사회인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또는 여러 아이의 엄마로 잘 살아가고 있는 저들을 여기저기에서 만나면서 저들의 반가운 인사에 작은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여기서 그 때를 돌이키며 특별히 감사를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교 설립 초기부터 남부 뉴져지 한국학교 이사회를 조직하고 33인이 함께 의지를 가지고 시작 하셨다고 들은 이사회는 참 좋은 분들이 한국인의 얼을 심겠다는 의지로 한국학교를 돕고 계셨던 남부 뉴져지 한국학교 이사회 였습니다. 분명한 목표와 비젼을 가지고 계획되는 모든 행사들을 학교를 믿고 아무런 조건없이 물질적으로 전신적으로 후원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자기의 유익이나 목적이 없이 순수하게 한인으로서의 자긍심만으로 협조해 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한분 한분 찾아 뵙지는 못하지만 이 지면을 통하여서라도 감사와 존경 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준비 되었던 행사들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두고 두고 잊을 수 없는 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학생들에게 Diner Dance Party를 마련해준 일 이었습니다.
물론 단순 댄스파티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세대차를 불만스러워하던 우리 아이들에게 부모들이 댄스파티도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저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우리 한국학교 학생들 뿐 아니라 이젹의 전체 한인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지금 비원의 파티룸을 빌려서 제대로 저녁을 한식으로 준비해 주고 이미 사회에 나가있는 선배들을 초청하여 각 전공별로 테이블을 마련하고 선배들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볼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고로 돌아가신 필라델피아 KYW-TV앵커였던 시아니 리를 주 강사로 하여 각 분야의 선배들에게 자기가 원하는 전공 분야의 내용을 함께 들을 수 있도록 함께하는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바쁜 부모님 밑에서 자칫 시야와 견문이 좁아지기 쉬운 우리 아이들이 미국사회에 먼저 뿌리내린 선배들을 모셔다가 좀더 넓은 안목으로 비젼을 가지고 내일을 볼 수 있도록 해보고자 함이었습니다.
미국 사회 각 분야에서 공헌하고 있는 한인 실업인, 의사, 종교인, 변호사, 직장인, 교수 등을 모시고 이들과의 시간을 통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는 가운데 자존감을 가지고 자아를 확립해갈 수 있도록 해 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위하여 들어가는 경비전액을 여러 이사님들께서 도네이션으로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인 사회 저명 인사들을 모시고 강연을 듣는 시간등을 수차례 준비 하기도 했었습니다.
해마다 한국학교 돕기 골프대회를 통하여 많은 후원금을 지원하셨던 것은 이사회 사모님들의 헌신적 봉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1992년도에 마련해 주셨던 이사회 후원으로 “한국학교 돕기 후원의 밤” 은 잊을 수 없는 감사의 시작 이었습니다.
사실 이사회의 후원이 없었다면 우리 한국학교 40주년은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들임을 학교를 위하여 일했던 한 사람으로서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미국의 학교교육은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일 뿐 인성교육이 없다는 것이 한국에서 교직에 몸을 담았던 전직 교사로서, 또 내 아이를 미국에서 교육을 시켜야했던 엄마로서 아프게 바라본 현실 이었습니다. 부모님들이 같은 문화권을 살아온 미국인들에게는 이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가 있겠지만 우리한인 들에게는 상황이 다르다는 생각을 그 때는 했었습니다.
사실 우리 1세대들은 자기자신의 선택으로 이 땅에 왔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건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건 본인 자신의 선택으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1세대들은 우리 자녀들에게 거의 강압적으로 우리 세대의 사고를 전혀 다른 환경을 살고 있는 우리 자녀들에게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의지에 의하여 이 땅에 살 수 밖에 없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학교에서와 가정이 전혀 다른 가치를 강요하는 가운데 자라가야하는 아픔을 가지고 자라가고 있는 것이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진 현실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자신의 적응에만도 벅찬 부모님들의 한국적 사고와 교육 형태는 우리 자녀들에게 참 혼란 스러웠을 것임을, 쉽지 않았을 현실이었을 것 임을 참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었습니다.
이제 제가 한국학교를 떠난지도 벌써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학교도 아이들도, 또 부모님들의 사고도 사회적 상황도 많이 변했습니다. 이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것은 다행히도 많이 발전해준 조국, 대한민국이 우리에게 부빌 언덕이 되어줌이 감사하고, 그래서 한국어의 필요성도 우리 아이들에게 더 인식이 되어졌음이 감사하기도 합니다.
교육의 효과는 하루 이틀에 나타나지도 않으며, 쉽게 측정될 수도 없고, 단기간내에 눈에 보여지지도 않는 것이지만 우리 아이들의 삶에 이정표를 주고 더 나은 내일을 살아갈 바른 비젼을 줄 수 있다면, 이것이 짧은 이 땅에서의 삶에 하나의 의미이며 보람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계시는 모든 분께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전합니다.
토요일 아침이면 바쁜 가운데 아이들을 학교로 태워오시는 부모님 그리고 소중한 시간을 한국학교에 할애해 주는 우리 학생들, 그리고 선생님들께 더 아름다운 꿈을 심어주는 우리 한국학교가 되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